《My Fair Lady》는 1964년 미국에서 개봉한 뮤지컬 영화다. 오드리 헵번이 엘리자 둘리틀을, 렉스 해리슨이 헨리 히긴스 교수를 연기했다. 이 작품은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을 원작으로 하며, 언어와 인간 변화의 가능성을 다룬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코벤트 가든 시장에서 꽃을 팔던 하층민 소녀 엘리자 둘리틀이 언어학자 히긴스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상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을 만큼 언어와 태도를 교정해 나간다. 처음에는 발음 하나 제대로 고치지 못하고 고생하지만, 결국 고급스러운 말투와 태도를 익히고, 마침내 숙녀로 인정받게 된다.
《My Fair Lady》는 줄거리만 보면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1960년대 초반, 미국과 서구 사회는 누구든 의지만 있으면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나는 《My Fair Lady》가 바로 이 시대 정신을 반영한 드라마라고 본다. 엘리자 둘리틀이 꽃파는 소녀에서 숙녀로 변모하는 이야기는 이런 신념을 생생히 보여준다. 당시엔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도 노력하면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했다. 교육을 확장하고, 산업화를 추진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이식하면, 오늘의 후진국도 내일의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보았고, 개발이라는 단어에 기대를 걸었다. 나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또한 《My Fair Lady》의 인기에 기여했다고 본다.
《My Fair Lady》는 그러나 단순한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이 언어를 통해 인간을 구분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발음과 말이 달라지자 사회가 엘리자를 다르게 대했다. 원작자인 조지 버나드 쇼는 인간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한 지식인이었다. 『피그말리온』에서 그는 인간 존재를 규정짓는 것이 피상적 외양이나 혈통이 아니라, 교육과 언어, 문화적 코드임을 보여주려 했다. 나는 《My Fair Lady》가 이 원작의 문제의식을 상당 부분 유지하면서, 대중적 이야기로 변신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My Fair Lady》는 인간이 어떻게 말과 그에 대한 사회적 반응 속에서 재구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엘리자 둘리틀은 처음부터 감정도 있었고 자존심도 있었다. 그러나 시장에서 꽃을 팔며 외칠 때 그녀가 사용하는 언어는 거칠다.
"I ain't done nothin' wrong, 'ave I?"
그렇지만 이에 대해 그녀는 진지한 반응을 받지 못한다. 무도회장에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세련된 억양으로 엘리자가 인사를 건네자 이번에는 사람들이 미소로 응답했다. 단지 사용하는 단어와 억양이 바뀌었을 뿐인데, 세상은 완전히 다르게 반응했다.
영화 후반, 엘리자의 다음 말은 세상의 반응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잘 보여준다.
"숙녀와 꽃 파는 여자 사이의 차이는 행동이 아니라 대우에 있다. 히긴스에게 나는 영원히 꽃 파는 여자지만, 대령에게는 숙녀가 될 수 있다."
픽커링 대령은 엘리자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했다. 그녀를 ‘Miss Doolittle’이라 부르며, 실험 대상이 아닌 숙녀로 대했다. 인간은 단지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언어를 통해 세상의 반응을 끌어내고, 그 반응에 의해 자신을 구성해 가는 존재다.
《My Fair Lady》는 마지막에 원작과는 달리 엘리자 둘리틀의 신분 상승을 암시한다. 무도회에서 사회적 인정을 얻은 뒤, 그녀는 히긴스 교수와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위치를 확보한다. 히긴스는 직접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아니지만, 엘리자는 히긴스와의 심각한 다툼 후에 집을 나갔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웃으며 히긴스 집으로 들어온다. 하층민 소녀가 상류 사회로 편입되고, 동시에 사랑을 얻어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언어능력은 신분상승의 충분조건으로 그려졌다.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영화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언어능력의 중요성이 사람들에게 최소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준다.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소통능력은 늘 중요하게 여겨졌다. 과거시험이라는 제도도 결국 글쓰는 능력을 보는 것이었다. 이 영화가 언어의 중요성을 과장한 것이 아니라, 단기간에 집중해서 향상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인간의 표현 능력은 여전히 성공과 직결된다. GPT 시대에도 언어의 중요성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GPT가 등장했을 때 가장 먼저 주목받은 것도 에세이 작문 기능이었다. GPT 능력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큰 매력을 느끼는 것도 결국 '글을 써주는 능력'이라고 본다. 학생들은 에세이를 대신 써달라고 요청하고, 연구자는 논문의 요약을 맡기며, 기업은 광고 문구 작성을 의뢰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GPT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있다.
엘리자 둘리틀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서 과거에 표현할 수 없었던 자존심을 정확히 언어화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GPT를 통해 우리의 막연한 느낌과 생각을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는가? 그래서 더 많이 느끼고 더 깊이 생각하게 될까? 아니면 우리의 표현 능력과 그것의 기반이 되는 사고 능력이 퇴화할 것인가? GPT가 사고를 퇴화시킨다고 믿는 사람들은 학생들의 과제에 AI 사용을 엄격히 금지하려 할 것이다. 인간 사고가 대체되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반면 사고를 확장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GPT를 활용하라고 권장한다.
새로운 도구를 만났을 때 진짜 문제는 효율이 아니라 사고 자체에 있다.
오래전 대학원 시절 나는 악필 때문에 과제를 타자로 제출했다가 무성의하다는 이유로 낮은 학점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새로 습득한 타이핑 능력을 활용하면 글씨 잘쓰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었다. 성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효율성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 경험은 나에게 중요한 질문을 남겼다. 기술은 나의 사고를 확장시켰는가, 아니면 둔화시켰는가.
나는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을 GPT를 통해 전달하는 것과 GPT가 만들어준 문장을 자기 생각처럼 사용하는 것은 이런 면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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