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과 지혜

〈라쇼몽〉에서 〈빨간모자의 진실〉까지: 진실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 GPT 시대의 소통과 서사에 대한 성찰

skcho 2025. 4. 8. 08:49

 
 1. 서론: 질문이 바뀌었다

무엇이  ‘진실’일까?  정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진실을 아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과거에는 언론, 법정, 학계 등에서 제공하는 정보 중에서 선택하면 되었지만, 지금은 무엇을 신뢰할 수 있는지도 불확실하다.   이 글은  영화 〈라쇼몽〉과 애니메이션 〈빨간모자의 진실(Hoodwinked!)〉이라는 두 영화를 통해 오늘날 커뮤니케이션의 특징을 살펴본다. 
 
 2. 라쇼몽: 말은 많지만, 소통은 없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1950)은   한 무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한 도둑이 얽힌 강간 및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진실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사건의 경위는 단순하다. 숲속에서 무사가 살해당하고, 그의 아내는 도둑에게 능욕당했다.  그런데
도둑(다조마루), 아내, 죽은 무사(영매를 통해), 나무꾼(목격자)의 증언이 각기 다르다.

 

도둑은 자신이 남자답게 싸워 여인을 정복했고, 무사를  정정당당한 결투 끝에 죽였다고 말한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을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자 자기 손으로 그를 죽인것 같다고 말한다.

무사(영매를 통해 등장)는 도둑이 여인을 능욕한 뒤, 여인이 도둑과 함께 도망가자고 제안해 수치심에 자결했다고 한다.

나무꾼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다가, 나중에 실제로 목격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 또한 앞선 진술들과 다르다.

 

이 네 가지 버전은 완전히 모순된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욕망, 자존심, 공포, 죄책감에 따라 사건을 재구성한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네 개의 진술된 이야기’속 어딘가에  흩어져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진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있다면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3. 빨간모자의 진실: 조각난 이야기들이 하나의 그림이 되다

 

빨간모자의 진실(Hoodwinked!)(2005)는 고전 동화 빨간 모자를 패러디한 애니메이션으로,   진실 구성의  다른 과정을 보여준다.

 

이 영화 역시 한 사건에서 출발한다. 늑대, 할머니, 빨간 모자, 나무꾼이 한 집에 모인 상황에서 누군가 과자를 훔치려 했다는 의심이 생기고,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기 위해 각각의 진술이 필요해진다.

 

. 늑대는 기자로 위장한 첩보원이었고, 단지 취재 중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 할머니는 익스트림 스포츠 선수이며, 평범한 할머니가 아니라는 비밀을 밝힌다.

. 나무꾼은 사실은 배우이며, 우연히 사건에 휘말렸다고 말한다.

. 빨간모자는 자신이 과자를 배달하러 왔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렸다고 증언한다.

 

이들 이야기는 각기 자신의 시점에 충실한부분적 진실이다 영화는 진술들이 반복되고 재조합되면서, 점차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구조를 갖는다. 관객은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리고 전체적인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라쇼몽〉에서는 진실이 분열된 상태로 남는다. 반면 〈빨간모자의 진실〉은 상호 이야기의 충돌을 통해 진실을 보여준다.  
 
4. GPT의 진실 생산: 정보인가 허구인가?

 

우리는 GPT라는 거대한 언어모델과 함께 살고 있다. 이 시스템은 라쇼몽의 네 인물처럼  서로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생산해 낼 수 있다.  GPT가 빨간모자의 진실처럼 집단지성의 결과로서 하나의 진실에 접근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

 

GPT가 생산하는 이야기들은 하나의 진실로 수렴하지는 않을 것 같다. GPT는 사용자가 원하는 방향, 신념, 또는 강조점에 부응하여 이야기를 생성한다. 예컨대, 어떤 사용자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고 하자:

 

"코로나19 백신이 위험하다는 증거를 제시해줘."

 

그러면 GPT는 그 방향에 맞는 이야기를 생산하려 한다.  팩트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이야기(스토리)를 생산하는 것이다.  

 

앞으로 GPT언어 처리 능력과 맥락 이해력이 강화되면, 이 현상은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GPT는 사용자의 어조, 맥락, 반복된 주제를 학습하면서, 점점 더 그 사람만의 언어와 관점을 반영한 응답을 하게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묻게 된다. 우리는 빨간모자의 진실의 길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라쇼몽의 세계로 가는가? 정보의 양과 속도가 증가하지만, 우리가 진실을 알게 되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  

 

 5. 기술이 아닌, 인간의 태도

 

 GPT는  즉석에서 의미를 생성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 GPT는 단순한 정보 제공자가 아니라, 사용자의 질문과 언어적 태도에 반응하여 '이야기'를 구성하는 능동적 존재에 가깝다.

 

과거 인터넷의 등장은 전 세계의 소통과 상호이해를 촉진할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실제로는 확증편향의 정보 소비와 분열을 야기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공지능의 발달을 두려워하면서 AI 대 인간의 대결을 상상한다단기적으로는 AI가 인간의 직업을 대체할 것이라는 불안, 장기적으로는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디스토피아적 상상이 그것이다그러나 어쩌면 더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진짜 대결은 인간 대 인간, 다른 해석, 다른 신념, 다른 욕망을 가진 인간들 사이의 갈등이 기술을 통해 증폭된다는 점이다. 
GPT는 어느 한 진실을 고집하지 않는다. 대신 사용자의 욕망과 언어를 바탕으로 다양한 가능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같은 질문이라도 누가, 어떤 맥락으로, 어떤 어조로 묻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생성된다. GPT는 거울이다. 그 거울은 정보의 객관을 반사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태도와 선입견을 반영한다.

 

결국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어떤 태도로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가 라쇼몽의 세계에 머물 것인가, 빨간모자의 길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는 인공지능의 성능이 아니라, 인간의 수용과 해석의 태도에 달려 있다. 사람의 태도와 소통의 윤리가 더욱 중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