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ing's Speech는 영국 조지 6세(버티)가 왕세자 시절부터 겪어온 말더듬증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의 형 에드워드 8세가 왕위를 포기하면서 원치 않았던 왕좌에 오르게 된 그는, 국민 앞에서 연설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와 만나 말하기 훈련을 시작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말더듬증을 극복하고,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을 알리는 역사적 라디오 연설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며, 당시 라디오는 대중 소통의 핵심 매체였다. 이 때문에 ‘왕의 음성’은 단순한 개인의 목소리를 넘어서, 국가의 권위와 정당성을 상징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여겨졌다. 특히 히틀러가 탁월한 연설 능력으로 독일 사회를 전쟁체제로 바꾸어 가는 것과 대비되어, 조지 6세의 말하기 능력이 단순한 개인적 문제로 볼 수 없었던 시기였다.
이 영화는 두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장애 극복과 의지의 서사로서, 타고난 언어장애를 극복하고 국가적 책무를 수행하며 훌륭한 연설을 완수한다는 이야기다. 이는 ‘자신감 회복’, ‘훈련을 통한 말하기 능력 향상’, ‘말은 누구나 배울 수 있다’는 교훈을 전하며, 발표 불안이나 말더듬 등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위로와 용기를 제공한다.
둘째 해석은, ‘어떻게 말해야 한다’는 과도한 사회적 기대가 오히려 심리적 억압이 되어 말하기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영화 초반, 조지 6세는 라이오넬이 유도한 특정한 환경에서는 말더듬 없이 말할 수 있었고, 이는 그의 언어 문제가 전적으로 심리적 압박과 긴장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한다. 리오넬은 이러한 억압의 정서를 이해하고, 치료에 반영해 나간다. 물론 단지 심리적 요인만 해결된다고 해서 말더듬이 바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 누적된 말의 습관은 조건반사처럼 몸의 일부가 되어 있으므로,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반복 훈련과 장기적인 노력이 함께 요구된다. 이처럼 심리적 억압과 신체적 습관이 상호 작용하면서 말더듬이 지속된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킹스 스피치』는 단순한 장애 극복 드라마로도 읽힐 수 있지만, 사회적 기대와 자기 억압을 극복하고, 자기 목소리를 되찾아 가는 과정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누구나 안에 있는 ‘조지 6세’
우리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조지 6세와 유사한 심리적 압박을 경험한다. 특정한 자리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에 대한 이상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회의에서는 간결하게 핵심을 말하고, 발표에서는 논리적이고 인상 깊게, 누군가를 위로할 때는 따뜻하고 안정감 있게 말하고자 한다. ‘이럴 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상적 말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이 기대와 실제 자신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존재한다. 이 간극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그중 하나는, 자신이 말하는 방식이나 내용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낄 때 되도록 말을 줄이는 전략이다. 이러한 반응은 시간이 지나면서 습관처럼 굳어지기도 한다.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담아두게 되면, 감정이 내부에 축적될 수 있다. 영화에서도 조지 6세는 공식 석상에서 말을 해야 할 때마다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을 보이며, 결국 말을 하지 않는 것 또는 피하는 것을 선택한다. 예컨대, 초반 마이크 앞에 섰을 때 그는 단어 하나를 시작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 끝내 물러선다.
현실에서도 치열한 논의 자리에서 자신의 표현력 부족을 의식하는 순간, 말보다 감정이 앞서거나 아예 말을 멈추게 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감정이 쌓인 채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은 때때로 갈등을 더 키우기도 한다.
또 다른 반응 방식은, 자기 감정이나 생각과 상관없이 상황에 맞는 말을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회의나 협상 자리에서 다수의 분위기나 기대되는 흐름에 맞춰 의견을 표현하거나, 누군가가 작성한 연설문을 비판 없이 낭독하는 방식이 이에 해당한다.
공식적 자리에서 입장을 말한 뒤, 이후 사석에서 “그건 상황상 그렇게 말한 것뿐”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말과 태도의 분리는 때로는 사회적 역할 수행에 필요한 전략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표현 행위가 반복될수록 자기 내부와 말 사이의 연결감이 희미해진다.
이 영화는 이런 점에서 침묵이 아닌 말하기, 완벽한 표현이 아닌 진짜 목소리를 지향한다. 조지 6세는 누군가가 대신 써준 연설문을 그저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말로 국민 앞에 서야 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언어치료사 리오넬 로그는 그에게 “생각 없이 말하라”는 식의 훈련을 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감정과 자기 언어를 찾는 훈련, 자신이 느끼고 믿는 것을 말하는 연습을 함께 한다.
현실에서도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말과 자기 내면의 말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대에 부응하는 언어를 선택할 것인지, 조금 미숙하더라도 자기 목소리를 낼 것인지 사이에서 갈등한다. 전자를 택하면 외형적으로는 무난해 보이지만, 자신의 말이 아닌 말을 반복하게 된다. 후자를 택하면 표현의 미숙함이나 긴장감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 말은 적어도 자기 것으로 남는다.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은 이와 같은 딜레마를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오늘날 우리는 ‘말 잘하는 법’에 대한 수많은 모범사례 속에 살고 있다. 유튜브, 블로그, 강연 영상, 화법 강의, 책, 그리고 GPT와 같은 인공지능 도구까지 — 말하기를 돕는 수단은 넘쳐난다. 이들은 모두 “어떻게 말해야 주목받는가”, “무엇을 말해야 설득력 있는가”를 알려준다.
GPT는 이러한 환경을 대표하는 하나의 사례다. 표현을 돕는 도구로서 GPT는 두 가지 상반된 길을 가능하게 한다.
첫째, 자기 표현의 확장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다. 생각은 있지만 말로 풀어내기 어렵던 이들은 GPT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생각을 다듬어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GPT는 내면의 목소리를 외부로 표현하는 매체가 된다.
둘째, 말해야할 바를 정해주는 도구다. 사용자는 자신의 생각 대신 ‘가장 그럴듯한 표현’을 GPT에게 요구하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점점 묻혀진다.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도구가 ‘좋다/나쁘다’는 판단이 아니라, 그 도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다.
『킹스 스피치』는 “어떻게 말해야 잘 말할 수 있는가”보다 먼저, “그 말이 누구의 말인가”를 묻는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소통 환경에서 중요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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