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을 잘하려면

AI시대 설득력

skcho 2025. 11. 25. 09:30

 

설득은 인간의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의사소통 행위다. 수많은 이론이 이러한 설득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되어 왔다. 그중에서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설명하는 데 특히 중요한 이론은 페티와 카이오포의 **정교화가능성 모델(ELM)**인 것 같다. 이 이론은 인간이 메시지를 처리할 때 중심 경로주변 경로를 오가며, 정보 처리 능력과 동기가 있을 때는 메시지의 내용을 정교하게 해석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주변 단서를 통해 판단한다고 설명한다. 정보가 과잉인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어떤 경우에 주변적인 단서를 이용해서 태도나 행동을 결정하는지를 규명해 주는 이론이라는 점에서 유용성이 높다.

 

이 이론은 인간이 메시지를 읽고 태도를 결정할 때 두 가지 경로 중 하나를 이용한다고 설명하지만, AI가 등장하면서 이러한 설득의 경로에 본질적인 변화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정보 처리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메시지에 도달하기 전에 AI 요약·선별 과정이 하나의 필수 관문처럼 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전문적인 영역에서는 특히 길거나 구조가 복잡한 문서를 AI가 먼저 압축·해석해 제시하는 형태가 일반화되고 있다. 이때 독자는 더 이상 ‘원문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AI가 가공한 2차 텍스트를 읽는 사람이 된다.

 

이 변화는 문서 작성자에게 요구되는 설득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과거에는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 쓰는 능력, 독자의 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장치가 중요했다. 그러나 AI가 복잡한 정보를 자동으로 단순화하고 재구성하게 되면 설득의 핵심은 난이도를 낮추는 능력보다는 메시지의 정확성과 논리력이 될 것이다. 쉽게 쓰는 기술이나 감정적 호소의 장치들은 상대적으로 힘을 잃게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학술 글쓰기의 영역에서 이러한 변화는 두드러진다. 연구자는 연구의 중요성과 함의를 강조하며 독자를 설득해 왔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이미 논문 검색과 요약 과정에서 AI를 활용하고 있다. 이제는 논문을 먼저 읽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AI다. 따라서 학술 글쓰기에서 수사적 기교보다 과정·절차·용어 정의·자료 제시의 정확성이 우선될 것이다. 즉 논문의 영향력의 중심이 ‘가독성’이 아니라 ‘정밀성’과 ‘정보가치’로 이동한다.

 

이와 함께 수사학적 기법 이 갖던 설득적 힘도 약화된다. 대신 명확하고 함축적인 명제, 정확한 서술이 더욱 강력한 설득 자원이 된다.  전문가에게 요구되던 ‘비전문가도 이해하게 쉽게 쓰는 능력’ 역시 중요성이 줄어든다. 전문 용어는 AI가 자동으로 해석·요약하며, 독자는 난이도를 조절한 텍스트를 받아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 아니라 정보 자체의 질과 독창성이다. AI가 수많은 정보를 종합해 제시할 수 있는 시대에는 단순한 정보 재배치나 문맥 이동만으로는 가치가 생기지 않는다. 직접 경험에 기반한 1차 정보, 데이터의 원천 생산자가 더 큰 설득력을 가진다. 결국 설득은 수사적 장치보다 순수한 정보의 가치를 얼마나 명확하게 드러내는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설득력의 변화는 기본적으로 실용적인 글쓰기 영역에 국한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인문학적 글쓰기의 영역은 실용적 글쓰기의 이런 변화와는 달리 전통적인 글쓰기 방식이 중요시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