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성과 선택의 기회: 형식만으로 충분한가?
사람을 설득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 중 하나는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다.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는 대신, 스스로 결정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많은 심리학이나 설득에 관한 이론이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내린 결정에 더 오래 헌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설득 전략은 ‘선택권’을 주는 형식에 초점을 둔다.
어떤 종교의 선교캠프에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는 이러한 선택권 부여가 설득상황에서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보여준다. 친구를 따라 참가한 캠프에서 며칠간 다른 참가자들과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그러면서 유대감을 형성하게 된다. 마지막 날에는 한 사람씩 자신의 앞으로의 삶에 대해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새로운 종료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또 기존 신도들은 더 종교적인 헌신을 말하는 분위기에서 자신도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말을 하게 되었다. 그들의 권유가 아니라 스스로 해당 종교를 선택한 셈이다. 형식적으로는 자율적인 선택처럼 보지만 실상은 집단 분위기와 연출된 상황에 의한 반응이다. 그럼에도 ‘내가 말했다’는 자기선택은 일정한 심리적 효과를 갖는다.
그러나 선택 자체를 모든 사람이 중요시하는 것은 아니다. 선택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 쉬나 아이엔거의 실험은 이 점을 보여준다. 아이들이 퍼즐맞추기를 할 때 서양의 아이들은 예상한 대로 본인이 그릴 그림을 선택했을 때 가장 잘했지만, 아시아계 아이들은 본인이 선택한 경우보다 엄마가 선택했다고 믿을 때 더 잘 하였다. 선택의 자유를 통해 발휘되는 자율성을 아시아계 보다는 미국의 아이들이 더 중요시한 것이다. 결국 자율성을 발휘하는 방식이나 그에 대한 중시도는 문화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실험을 여러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지만, 필자는 선택 그 자체 보다는 선택한 내용의 적합성이 중요하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아시아계 아이들은 본인이 선택하는 것보다 엄마가 자신에게 맞는 것을 더 잘 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엄마 선택을 더 신뢰한 것이다. 반면에 서양 아이들은 엄마보다는 자신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즉 선택을 했다는 그 자체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었을 것이다.
아이엔거의 또 다른 실험결과는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그녀의 슈퍼마켓 실험에서 잼의 종류를 6가지만 진열한 매장은 시음해 보는 사람은 적었지만 판매량이 24개 잼을 진열할 매장보다 많았다. 선택권을 더 다양하게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오히려 선택을 하지 못한 것이다. 아이엔거는 이에 대해 선택에 따르는 인지적 피로 때문으로 해석한다.
이 실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율성의 핵심이 형식적인 선택 행위 여부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반영할 수 있는가라는 적합성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유롭기보다 부담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반영할 수 있는 환경을 원한다.
오늘날 우리는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알고리즘이 우리 대신 음식점을 골라주고 읽어야 할 기사나 보아야할 영화를 골라주는 시대에는 형식적 선택권이 충분히 보장된다. 그렇지만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선택의 인터페이스에서 우리가 그렇게 자유로움과 자율성을 느끼지 못할 경우가 많다. 바로 형식적 선택권은 있으나, 그 내용이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를 때다. 과거의 내 행동이 내가 미래에 원하는 것을 다 말해주지 않는다. 알고리즘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택의 피곤함을 피하려 누군가 대신 골라주기를 바란다. 오늘 날 ‘누군가’는 많이 있지만, 나를 정말 잘 아는 ‘누군가’는 드물다.
그래서 여전히 형식적인 선택이라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정부분 설득효과를 갖는다. 최소한 내가 원하는 것을 반영했다는 느낌은 가질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지속적인 행동변화력을 가질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제시된 선택지가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가이다. 그것이 포함되어 있으면 사실 선택 기회가 부여되는지는 중요치 않다. 오늘날 수많은 선택지가 제시되는 것은 역으로 그만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하니 선택한다는 느낌이라도 주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주변 조언을 구할 때가 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이렇다. ‘그것은 당신이 선택해야 하는 것이지 내가 대신해 줄 수는 없는 것 같다’는 대답이다. 내가 요청한 것은 대신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각 선택지에 대한 정보나 의견을 달라는 것이었다. 나를 잘 알고, 현재의 상황을 잘 알면 선택에 대한 조언을 줄 수 있는데, 이러한 대답은 ‘나는 네 상상황을 몰라’ 아니면 ‘내 말대로 했다가 잘 안되면 책임지라고 할지도 몰라서’라는 것처럼 들린다. 자율성의 존중이어야 할 선택권이 상대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진정으로 자율성 존중에서 주는 선택의 자유와 이러한 무관심과 이기적인 목적에서 부여하는 선택의 자유가 혼재되어 있다.
이런 면에서 마틴 킹 목사의 연설은 소통을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방향을 제시한다.
그는 군중에게 “이 길로 갑시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이 길로 가련다.”고 한다.
이 말은 초청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즉 형식적인 선택권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청중의 자율성을 존중한다. 그러면서 청중이 기꺼이 택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안토니우스의 연설도 그렇다. “그는 명예로운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브루투스를 직접 비난하지 않고, 청중 스스로 판단하게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청중이 들었을 때 공감이 갈 수 있는 내용이었다는 점이다. 둘 다 선택권을 내포하고 있지만 핵심은 내용의 적합성이었다.
진정한 설득은 자율성이라는 형식보다, 내 욕구가 반영된 결과를 보여줄 때 가능하다고 본다. 선택했다는 감각이 자율성을 만들어내긴 하지만, 그 선택이 진짜 나에게 맞지 않으면 지속력은 낮을 것이다. 일시적으로는 형식이 내용을 지배할 수 있겠지만 소통을 통해 상호 발전적인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관심과 그에 기반한 ‘내용의 적합성’이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고를 수 있는 기회’다.